칼럼 에세이

한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선우휘)
  • 날짜 :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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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휘-한 학생의 질문에 대하여


  매캐한 냄새가 나는가 하더니 사람들은 재채기를 하기 시작했다. 환자도 하고, 보호자도 하고, 위문객도 할 뿐 아니라, 간호원도 하고 의사도 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재채기 경쟁을 시키는 바람은 병원에 가까운 대학교 쪽에서 불어 오고 있었다. 학생들이 데모를 하니까 경찰이 가스탄을 쏘아 댄 것이 틀림없었다. 거기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학생들 데모 이제 좀 그만하지. 일 년 열 두 달……이건 전 천후 데모가 아닌가.」

  「경찰도 경찰이지, 이건 불꽃 놀이하듯 마구 쏴대는 거 아니야.」

  이상은 필자가 지난 여름 직접 경험한 것이다.

  요즘 의식적인 사람들이 학생 메모를 보는 눈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듯싶다. 학생 편을 드는 사람과 안 드는 사람.

  보통 사람들의 의견도 대게는 다음과 같다.

  「학생들이 데모를 않고, 세상이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구먼.」

  그리고 반드시 뒤이어

  「나라꼴이 학생들이 데모도 하게 됐어.」

  지금 우리 국민들은 머리를 두 개 가진 한 마리 뱀같이 사회의 여론도 개인의 마음도 두 갈래로 갈라져 각축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분명한 이율 배반이요, 모순 당착인데 그 원인은 돌아가는 세상 형편에 대한 파악이 불확실한 때문일 것이다.

  웬만한 정보를 알고 실상을 파악하는 지식인들도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딱 잘라 말하려 하지 않는다.

  A도 틀렸지만 B도 못마땅하다는 의견이다.

  얼마 전 학생이 나더러 당돌한 질문을 해왔다.

  「데모를 해야 합니까, 안해야 합니까.」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하면 간단했지만, 나는 분명히 대답해 주었다.

  「하지 말라」고. 그러면 나는 무슨 자신을 가지고 단호히 <노>라고 대답했을까.

  막말로 하여 학생 개인도 사회도 <손해>가 나면 났지, 이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이치는 간단하다.

  학생은 그러다가 욕을 하고, 학교에서 쫓겨나거나 교도소에서 복역을 해야 하니 손해요, 데모를 막기 위해 상당한 경찰력이 할애되어 도둑들이 들끓기 쉬울 것이니 손해다. 더욱 기물을 파괴하거나 태워 버려 무엇인가 이땅 위에 있던 것이 없어져 버리니 그만큼 손해인 것이다.

  도대체 학생들은 누구를 위해 그토록 자기를 희생해야 한단 말인가. 마땅히 정치가들이 해야 할 일들을 왜 배워야 할 학생들이 도맡아 나서야 하는가.

  경찰이 걸핏하면 잡아 가는 것이 못마땅하다고도 하지만, 치안을 맡은 경찰로서는 그대를 보고만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은 어떤 신념을 가지고 하는 일로 믿고 있을 터이니, 누가 동정하는 것을 오히려 우스워할 것이다. 다만 본인들보다 속을 태우고 마음으로 앓는 것은 그런 학생들의 어머니요, 아버지일 것이 마음에 걸린다.

  학부모들 가운데는 그런 자녀들이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러다 보면 러시아의 공산주의자 막심 고리키의 소설 《어머니》의 경우처럼 자녀들보다 더 정부에 적개심을 돋우고 투쟁하고 나설 수도 있겠으나, 대개의 부모는 잘하고 못하고는 차치하고 어버이의 정으로 하여 걱정이요, 견디기 어려운 슬픔일 것이다.

  은근히 4·19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지 않다고 하는데, 그런 건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때와는 시대상황이 다르고, 권력층이 사용하는 물리적인 힘도, 정권수호의 의지도 다르며 무엇보다 사회각계의 호응도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또 만일 4·19같은 경우가 재발한다면 재빨리 5·16같은 경우도 뒤따라 악순환은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어디 사회꼴이 그 정도로나 머물 것인가. 이 나라가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의 타이티섬처럼 홀로 달랑 위치하고 있지 않는 한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남조선 혁명 노선>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은 분명하며, 소련은 물론 중공도 굳이 그것을 견제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근래 가끔 운동 경기나 하고 있다고 안심하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또 그꼴이 되면 돈이 많거나 어디 줄이 닿는 사람들 가운데는 겁먹고 무슨 방법으로든지 미국을 위시한 외국으로 빠져 나갈 것이니, 결국 이 나라는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데모가 판을 치게 되면 데모는 인기가요처럼 삽시에 번져서 모든 질서는 파괴되고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나라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4·19 직후 초등학교 아동들까지 데모하고 나선 일을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종류의 데모에도 반대하는 것이다.

  더욱 어떤 경향의 학생 데모에 관하여는 결단코 <노! >라고 소리친다.

  그것은 반정부 데모도 아닌 반국가(반체제) 데모일 경우이다. 도대체 이 나라가 40년 동안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지탱해 온 나라인가. 아직 원숙한 자유 체제랄 수는 없지만 궁극적으로 자유를 지향하는 이나라 체제는 아주 귀중한 체제이다.

  학생들은 교과서대로 안 된다고 불평하는 모양이지만, 당위와 실제가 말 이상으로 다른 것이며, 이상에 이르는 현실처리란 얼마나 어려운가도 이제 알 만하지 않는가.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극히 일부 학생들의 기성 세대에 대한 태도요, 그 사상 경향이다. 내가 보기에 1800년 후반의 제정 러시아 학생들이 가졌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악령(惡靈)》에 나오는 학생들을 방불케 하는 우리 일부 학생들은 기성 세대의 리버럴(자유주의) 따위에는 코웃음이나 치고, 야다오 현재는 동반자시하듯이 보이지만 문제로도 안 삼고 있으며 오직 <혁명>만 목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마르크스나 바쿠닌에 심취한 당시의 러시아 청년들과 그 후계자들이 일으킨 러시아 공산혁명으로 오늘날 소련이 인류에게 갖다 준 것이 계급간의 증오 외엔 과연 무엇이 있는가. 솔제니 친의 《수용소 군도》를 읽어 보거나 소련과 동구, 쿠바 등 지금의 몇 나라꼴만 보아도 알 일이 아닌가.

  학생들이 또 한가지 잊어서 안 될 것은, 해방후 40년간 지금 학생들의 투지 이상의 투지로 공산주의자들과 사투를 거듭하며 살아 남은 기성 세대가 아직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만약의 경우 그들은 가만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제 노경에 든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차라리 감기이지, 결코 학생들의 힐난도 행패도 아닌 것이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기성 세대들이 학생들에게 할 말을 해주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점이다.

  더욱 지난날 공산주의에 동조했지만 그후 과감히 그것을 던져 버린 사람들이 어째서 <조지 오웰>이나 <라프 시로네>처럼, 자기의 체험을 생생히 후배들에게 전달하려 하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젊은 한때는 그러는 법이다>라고 간단히 보는 기성 세대도 있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그 한때에 그래 보다가는 언제 어떤 변을 당할는지 모르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나라인 점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낙관은 금물이 아니라 적이다.

  단 한 가지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젊은이들이 갖게 마련인 <피끓는 정열>이며 <가만히 있지 못하는 행동성>이다.

  그러나 일제치하에서, 특히 그 종말기에 데모는커녕, 집회도 못하고 숨을 죽이며 살아 남으려만 하던 기성 세대의 젊은 시절과 비교할 때 ㅡ 나름으로 앞으로의 여러 가지 고민은 있겠지만 ㅡ 지금의 젊은이들이 향유하는 자유와 정열을 쏟을 분야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것이다.

  일제 때 젊은 시절의 이용설 박사가 망명지인 북경에서 자기만 공부하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에 합류하려고 했을 때, 도산이 「자네가 할 일은 의술로써 장차 동포의 병을 고치는 일이다」라며, 학업을 계속하도록 타일렀다는 일화를 학생들은 깊이 깊이 음미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다.

선우휘 <아버지의 눈물>, 동서문화사